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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닮아가는 삶
감리교에 대하여

기독교 대한 감리회 약사

관리자 2013.01.15 13:47 조회 수 : 512197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온 19세기 말, 우리 민족은 봉건적 체제의 붕괴와 외세 침략으로 인한 정치적 사회적 위기를 맞고 있었다. 봉건적 사회 체제를 이념적으로 지탱해 오던 전통 종교는 변화를 갈망하는 민족의 영적 윤리적 갈증을 해소시켜 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여러 경로로 전파된 복음은 우리 민족을 죄에서 구원하였고 새로운 역사의 원동력이 되었다.


미감리회·남감리회 선교부 선교 시대

1. 복음 수용과 선교사 내한
1870∼1880년대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갈망하는 한국인들은 만주와 일본에서 기독교 복음을 접하고 성서를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이들이 해외에서 출판한 한글 성서들은 매서인을 통해 국내에 들여와 읽혔고 그 결과 많은 세례 지원자들이 나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1883년 9월 미감리회 볼티모어 연회 소속인 가우처(John F. Goucher) 목사는 외교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 중이던 민영익을 만난 후 한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가우처 목사는 미감리회 국외선교부에 한국 선교 착수를 촉구하였고 일본 주재 미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로 하여금 한국 선교 가능성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중국과 일본에서 감리회선교를 개척했던 매클레이는 1884년 6월 24일 내한해서 ‘학교와 병원 사업을 해도 좋다.’는 고종의 윤허를 받았다. 이에 미감리회 국외선교부는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부부와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부부, 국외여선교부는 스크랜턴 대부인(Mary F. Scranton)을 초대하여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였고, 이들 중 아펜젤러 부부가 제일 먼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내한하였다.

2. 미감리회의 한국 선교
미감리회의 선교는 교육과 의료, 문서 사업으로 시작되었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은 한국 근대 교육의 요람이 되어 많은 지도자들을 배출하였으며, 시병원과 보구여관은 한국 근대 의료사업의 요람이 되었다. 감리회 출판사에서 펴낸 성서와 서적은 복음 전도에 유효한 도구가 되었고 한글문화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1887년 7월 24일 배재학당 학생 박중상이 첫 감리교 세례교인이 되었고, 1887년 10월 9일 서울에서 오늘의 정동제일교회의 모체인 ‘벧엘예배당’이 설립되었다. 1897년 서울과 인천, 평양에서 엡윗청년회가 창설되었는데 이는 오늘의 감리교 청년회와 청장년선교회 및 남·여 선교회의 모체다. 선교 초기부터 신학반과 신학회를 조직하고 한국인 목회자 양성을 추진하여 1901년 최초 한국인 목사로 김창식 목사, 김기범 목사를 배출했다. 미감리회에서는 1902년 하와이 이민 선교를 시작으로 북만주와 몽고, 일본 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3. 남감리회의 한국 선교
남감리회 선교의 시작은  개화파 지도자 윤치호가 망명중인 1887년 4월 중국 상해에서 세례 받고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되면서 부터이다. 그는 미국에 유학할 때부터 남감리회 국외선교부에 한국 선교를 촉구하였다. 이에 1895년 10월 18일 중국에 있던 헨드릭스(E. R. Hendrix) 감독과 리드(C.  F. Reid) 선교사가 내한하였고 이듬해 8월 리드 부부가 서울에 정착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그 결과 1897년 5월 2일 고양읍에 첫 남감리교회가 설립되었다. 남감리회에서도 배화여학교, 한영서원, 호수돈여학교, 구세병원 등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였고, 태화여자관을 비롯하여 개성, 원산, 춘천 등지에 여자사회관을 설립하여 한국 근대 사회복지사업의 문을 열었다. 남감리회는 선교 초기부터 신학교육에 있어서 미감리회와 협력하였고, 1907년에 두 교회 연합으로 협성신학교를 설립하였다. 남감리회는 1907년 동만주 선교를 시작으로 만주, 시베리아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4. 부흥운동과 토착 신학
1903년  원산에서 남감리회 선교사 하디(Robert A. Hardie)의 회개로 시작된 부흥운동은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거쳐 1909년 백만명구령운동으로 연결되었다. 한국인들은 이 부흥운동을 통해 회개와 중생과 성결을 체험하였고, 기독교적 가치와 윤리 의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신앙체험을 바탕으로 복음을 주체적으로 해석하려는 토착 신학이 감리교 신학자들에 의해 수립되었다. 노병선 목사는 기독교를 동양과 서양을 포괄하는 ‘하늘의 종교’이자 한국의 근대화를 촉진시킨 ‘은혜의 종교’로 변증하였다. 최병헌 목사는 동양 전통 종교와의 대화를 통해 ‘기독교의 절대성’을 규명하였다. 이같은 토착 신학은 성서와 기독교 신앙 전통에서 동양의 문화·종교 전통을 새롭게 해석하여 수구 세력의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해소시켰으며, 기독교가 민족 문화와 종교 전통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문화선교의 길을 열어 주었다.

5.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일제의 침략과 지배에 저항하는 감리교인들의 민족운동은 구국기도회로 시작하여 다양한 항일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전덕기 목사는 상동교회 엡윗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을 중심으로 많은 민족운동가들을 규합하여 국권 회복운동과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경기도 이천지방 구연영 전도사는 교회 청년들로 구국회를 조직하여 민족 계몽운동을 벌이다가 아들과 함께 일본군에 체포되어 희생되었고, 같은 해 강화읍교회 김동수 권사도 의병운동과 관련되어 두 동생과 함께 일본군에 희생되었다. 1911년 105인사건 때 윤치호, 서기풍, 안경록 등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3·1운동 때 이필주 목사, 신홍식 목사, 정춘수 목사, 최성모 목사, 오화영 목사, 신석구 목사, 박동완 전도사, 박희도 전도사, 김창준 전도사 9명이 민족대표로 참여하여 옥고를 치루었다. 3·1운동 당시 교회는 만세운동의 구심점이 되었고 그로 인한 희생도 컸다. 수원지방의 제암리와 수촌리, 화수리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당이 일본군의 방화로 불탔고 교인들이 희생되었으며,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과 평양 남산현교회 부목사 박석훈 등이 옥중 순국하였다. 3·1운동 이후에도 감리교인들은 상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단체, 애국부인회 등 민족운동 단체에 적극 참여하였고, 농촌계몽운동, 절제운동 같은 민족주의적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조선감리회 자치 선교 시대

6. 남북 감리회 합동
3·1운동 이후 한국 교회의 자립 의지가 높아지면서 미감리회와 남감리회 지도자들은 교회 합동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1924년 두 교회 ‘교회진흥방침연구회’를 중심으로 교회 합동을 추진키로 하고 1925년 ‘남북 감리교연합기성위원회’가 조직되어 교회 합동을 위한 실무작업에 착수하였다. 미감리회와 미남감리회 총회에서도 한국 교회의 합동운동을 인정하였고 1930년 11월 18일 남북 감리회 대표 22명으로 합동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30년 12월 2일 ‘기독교조선감리회’ 창립 총회가 서울에서 열려 초대총리사로 양주삼 목사를 선출하고 한국 감리교회의 ‘자치교회 시대’를 열었다. 한국 감리교회는 그 설립 취지로 ‘진정한 기독교회’, ‘진정한 감리교회’, ‘조선적 교회’의 3대 원칙을 선포하였으며 신앙 및 신학 원리로 8개조 “교리적 선언”과 16개조 “사회신경”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모든 의회 구성을 평신도와 성직자 동수로 하여 평신도의 역할을 증대시켰으며, 여성 성직의 문호를 개방하여 1931년 연합연회에서 한국 최초로 여선교사 14명이 목사 안수를 받았다.

7. 교회의 영적 갱신과 신학의 발전
1930년대 한국교회가 점차 신앙적 영성과 사회적 지도력을 상실한 채 비판을 받고 있을 때, 이용도 목사는 부흥회를 통해 영적 각성과 교회의 갱신을 촉구하였다. 그의 몰아적이고 체험 중심적인 신비주의 신앙이 일부 교회로부터 견제와 비판을 받았지만, 그가 보여 준 진솔한 ‘예수 중심’의 신앙과 삶은 큰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영성 회복에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또한 1930년대 한국 교회는 진보·보수 신학 사이에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웨슬리 복음주의 전통에서 진보적 신학을 수용하였던 정경옥 목사는 ‘신앙에서는 보수주의, 신학에서는 자유주의’ 입장을 취하면서 ‘신학의 현대화’와 ‘신학의 향토화’를 추구했고, 경건적 신앙 실천을 바탕으로 성서의 절대 권위를 강조했던  변홍규 목사는 보수적 신학 전통을 계승하며 한국 감리교회의 신학 발전에 기여했다.

8. 일제 말기 교회 수난
일제 말기 교회는 ‘신사참배’를 비롯한 일본의 국가 종교의식을 강요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일제의 회유와 위협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수용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점차 강력해지는 일제의 억압 하에 한국 감리교회는 1943년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이 되었다가 1945년 7월 말 ‘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 흡수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신앙양심과 민족의식에 투철한 신앙인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투쟁하였다. 예산제일교회 청년·학생들이 ‘학생속회’를 통해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하다가 발각되어 투옥되었고, 모곡교회의 민족운동가 남궁억 전도사에게 영향을 받은 홍천과 춘천 지방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은 ‘십자가당’을 만들어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투옥되었다. 그리고 동부연회의 철원읍교회 강종근 목사, 회양읍교회 권원호 전도사, 천곡교회 최인규 권사 등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투쟁하다가 옥중 순교하였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자립 선교 시대

9. 민족 분단과 교회 분열
우리 민족은 8·15해방과  함께 남북 분단의 비극을 맞았다. 38선 이북에 있던 교인들은 1946년 서부연회를 재건하였으나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극심한 수난을 받았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공산정권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투옥되었고, 철원에서는 장흥교회 청년들이 애국청년단을 조직하여 반공투쟁을 벌이다가 투옥되었다. 결국 북한에 있던 많은 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하였고, 이후 북한 교회는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6·25 전쟁으로 많은 예배당이 파괴되었고 수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다. 전쟁을 겪은 후 남과 북사이에 정치·문화·종교적 갈등과 대립 구조는 더욱 심화되었다. 이런 민족의 분단상황에서 교회는 내적 갈등과 분열로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 감리교회도 해방 직후 재건파·복흥파 분열을 시작으로 1954년, 1970년, 1974년에 각각 교회 분열의 아픔을 겪었으나 오래지 않아 다시 합동함으로 ‘하나된 감리교회’ 전통을 이어 나갔다.

10. 교회성장과 해외선교
전쟁 후 감리교회는 미연합감리회 선교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재건과 복구 작업을 신속하게 전개하였다. 그리고 1968년 온양에서 개최된 한·미 선교정책협의회를 계기로 한·미 감리교회는 선교의 동반자 관계를 정립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감리교회는 교회 부흥과 민족 구원의 선교적 사명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1964년 김활란, 홍현설의 발의로 시작된 민족복음화운동은 초교파적 대중부흥운동으로 연결되었고, 1974년 시작된 ‘5천 교회 1백만 신도운동’과 1987년 시작된 ‘7천 교회 2백만 신도운동’은 교회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 결과 해방 당시 5만 명 수준이던 교세가 1984년에 90만 명, 1996년 현재 7개 연회, 국외선교연회, 서부연회, 183개 지방, 4,700교회, 135만 명 교인을 넘게 되었다. 이처럼 교회 성장을 이룩한 한국 교회는 해외 선교를  통한 세계복음화에 적극 참여하였다. 1958년 볼리비아 선교를 시작하였고, 1965년 ‘감리교 선교 80주년 기념사업’으로 사라왁 선교가 시작되었으며, 1970년대 태평양 동아시아 지역, 1980년대 동남아시아 중동 지역과 아프리카 지역, 그리고 1990년대 러시아와 동유럽, 중국 등 옛 공산권 지역으로 선교가 확산되었다.

11. 교회 일치운동과 사회 참여
‘하나된 교회’를 지향하는 한국 감리교회는 해방 후에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대한성서공회, 대한기독교서회, 한국찬송가위원회, 기독교방송, 대한기독교교육협회, 기독교청년회, 여자기독교청년회를 통한 초교파 연합사업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리고 아시아교회협의회, 세계교회협의회, 세계감리교협의회 등 국제적 교회일치운동 기구에 참여하면서 아시아와 세계 교회 신학과의 교류를 통해 감리교회의 선교 및 신학적 과제를 확인하였다. 1960년대 이후 감리교 신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토착화 신학’은 기독교 신학 전통에서 한민족의 종교·문화 전통을 재해석함으로 동·서 신학의 교류와 대화의 길을 열었다. 그리고 신앙인의 적극적인 사회 현실참여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선교’ 신학 입장에서 1961년부터 산업선교가 시작되었다.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노동자들의 인권 회복과 노동 환경의 구조적인 개선을 위한 노력으로 발전된 산업 선교는 1970년대 들어서 사회정의 구현운동, 민주화운동으로 발전하였으며, 1980년대 노동운동, 농민운동, 도시빈민운동, 환경운동, 통일운동으로 이어졌다.

12. 선교 100주년과 자치 60주년
한국 감리교회는 ‘선교 1백주년’을 맞아 1984년 6월 24일 ‘기독교대한감리회 1백주년 기념 연합예배’를 개최하고 “기독교대한감리회 1백주년 신앙선언”을 발표하였으며 1985년 4월 5일에 개최된 ‘기독교대한감리회 1백주년 기념대회’에서는 “기독교대한감리회 1백주년 기념대회 선언문”을 채택하여 선교 1세기를 정리하고 선교 2세기를 전망하는 신앙과 신학적 결의를 밝혔다. 그리고 1990년 10월 29일 ‘기독교대한감리회 자치 60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하고 “기독교대한감리회 자치 60주년 선언문”을 통해 한국 감리교인들은,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는 교회와 민족 앞에서 그리고 나아가서 세계의 참된 평화를 위하여 우리의 선교적 사명을 마음 속에 되새기면서’ ‘새로운 각성과 결단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할 것’을 다짐하였다.
한국 감리교회는 한 세기 역사를 통해 1)성서 전통 이성 체험을 바탕으로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웨슬리 복음주의 신앙 전통 2)한말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민족이 처한 사회·국가적 상황과 현실에 적극 참여하여 민족의 구원을 구현하는 민족주의 신앙 전통 3)기독교 복음을 한민족의 역사·문화적 전통에서 주체적으로 수용·해석하는 토착적 신학전통 4)‘하나의 복음’,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 일치운동 정신에 입각하여 다른 교파 교회와 대화와 협력을 추구하는 에큐메니칼 신앙 전통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역사 및 신앙 전통을 계승한 오늘의 한국 감리교회는 민족과 세계 복음화, 민족의 평화 통일 그리고 세계 인류의 평화공동체 구현을 위한 선교 사명이 있음을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