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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에 대하여

포츠머드 강화조약(1905)으로 한국에서의 정치, 군사, 경제상의 특권을 인정받은 일본은 한국의 주권을 박탈하고 식민통치를 준비하였다. 이에 고종은 감리교 선교사 헐버트를 통해 미 대통령에게 밀지를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는 복음 선교뿐만 아니라 한국의 문화와 역사의 연구자이며, 교육자로서 정치적 문제에 관심하고 사역하였으며 코리아 레포지토리와 코리아 리뷰를 편집하고, 연구논문 등을 발표하였다. 그의 도미를 알아챈 일본은 그를 회유하였으나 그는 워싱톤으로 갔다. 일본은 이등박문을 급파하여 을사보호조약을 강제 조인하고 미국에 전문을 보냈다. 이로 인해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미 친일 정책으로 돌아섰다. 이 당시에도 학교 건립은 계속되어 개성에는 호스돈 여학교가 세워졌고, 1899년부터 존스가 주도하던 신학회가 1906년에는 성경학원으로, 그리고 1907년에는 남북감리교회가 연합하여 서울 서대문에 협성신학교(현 감신대)를 설립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해 국정이 어수선항 때에 105인 사건이 발생 했는데 이는 한국에서 가장 반일적인 세력이 기독교였음을 파악한 총독부의 조작극이었다. 이는 서울의 YMCA와 평양의 신민회 운동을 향한 반격이었다. 한국선교활동의 시작이 교육활동이었는데 일제는 학교교육에서 성경, 지리, 역사 등의 교육을 배제하였다. 1919년 항일비폭력 운동인 3.1절 운동에 기독교인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민족대표 33인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는데 그중에 감리교 대표는 9인이었다. 이는 감리교회의 신앙이 하나님 신앙과 민족의 십자가를 지고  독립정신으로 무장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교회운동과 민족운동을 병행(윤치호, 이승만, 남궁억)하거나 목회적 본분을 다하는 이(현순, 손정도, 이필주, 신석구, 전덕기)들과 오직 민족운동에 전념한 이(김구, 안창호)들로 분류되는데 이들은 사회 교육과 민족을 위한 구원운동을 수행하였다. 이들에 의해 임시의정원, 대한국민회의, 한성정부 등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도록 하는데 산파역할을 감당하였다.
1930년 미북감리교회와 미남감리교회는 우리의 요청에 의해 통합을 위해 합동전권위원회를 조직하여 통합을 의논하여 교리적 선언과 사회신경을 채택하고 기독교 조선 감리회를 탄생시키게 되었다. 그 후 일본의 문화정책에 의해 종교와 교육을 분리시키고, 각 기관으로 하여금 신사참배를 하게 하였다. 이는 일본의 천황제를 신격화한 국가 종교로서 일본의 군국주의를 정당화하였다. 신사참배에 대해 한국 그리스도인은 민족적 양심과 신앙적 양심에 따라 이를 거부하였지만 점차 학교와 교회에 강요하자 교회는 이에 굴복하여 종교적 수난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은 의도적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투옥과 고문 등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되었고 마침내 감리교회는 1942년 제2회 총회를 기점으로 폐쇄되었고 1943년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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