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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에 대하여

요한 웨슬레에 대하여 - 요한 웨슬레의 생애의 개관

관리자 2013.01.15 13:49 조회 수 : 1088

Ⅰ. 요한 웨슬레의 생애의 개관

요한 웨슬레(John. Wesley)가 태어날 당시 영국은 청교도 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또한 합리주의의 물결이 계몽주의 형태로 표출되고 있었다. 그리고 토마스 페인에 의하여 불신앙의 사상이 영국 전역을 강타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설교는 냉랭하고 대부분의 도덕적인 내용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18세기에 영국에서 복음주의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인물 중의 한사람이 요한 웨슬레였다. 이 복음주의 운동이 발전되고 확장되어 결국에는 감리교회를 이루게 되었다.

요한 웨슬레는 사무엘(Samuel)과 수잔나(Susannah) 사이에서 19남매 중의 15번째로 1703년에 영국 엡워스(Epworth) 지방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설교자였으며 교회에서 충성된 봉사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웨슬레 가문의 계보를 살펴보면 그의 조부였던 바돌로메 웨슬레는 그의 집안에서 최초로 옥스포드에서 학업을 연마했다. 그리고 도체스터의 요한 화잇씨의 영향과, 결혼하여 사무엘을 낳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웨슬레의 부친이었다.

사무엘은 그의 나이가 20세가 될 때 그의 독립 교파를 떠나 영국 교회로 교직을 옮긴 후에 옥스포드 대학에서부터 칼리지에 급비생으로 입학 그는 기골이 장대한 쾌남아였다.

요한 웨슬레는 어렸을 적에 그의 어머니인 수잔나로부터 여러 가지의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에게 글씨를 쓰는 법, 논문 쓰는 법 등을 웨슬레는 어릴 적부터 철저하게 교육받게 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교육의 영향은 또한 그의 장년기의 집필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웨슬레의 가정은 넉넉하지 못했다. 항상 빈곤에 시달리는 생활을 하게되었고 그의 아버지인 사무엘 마저도 주위의 인심을 잃은 터이라 그의 가정 생활은 어려운 편이었다. 웨슬레가 어렸을 때에 그의 가정에 큰 화재가 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화재 속에서도 많은 그의 가족들은 단 한명의 부상자도 없이 모두 무사히 구출되게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 웨슬레는 하나님께 감사했고 그의 설교에서도 이 구원의 사건을 많이 인용하곤 했다. 웨슬레의 아버지인 사무엘도 웨슬레의 교육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그의 재학 중에 보낸 서신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렇듯이 그의 유년 시절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씩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10세 되던 때에 요한 웨슬레는 차터 하우스 스쿨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가 아주 어렸기 때문에 이시기는 그에게 있어서 상당한 어려움의 시기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시기에 그에게 있어 어려움의 시기만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유명한 음악가인 헨델과 펩쉬를 만나게 되었고 또한 특별한 교제와 친분 관계도 가지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음악을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도 이루어졌던 사실을 알 수 있다.

1720년 첫여름에 차터하우스를 떠나 옥스포드에 있는 크라이스트 처치 대학에 입학을 하였다. 그는 언술에 있어서도 뛰어났고 작문에도 상당한 소질을 소유하게 되었다. 1724년 웨슬레의 가족은 우릇으로 이사를 하게되었다. 물론 그 당시 역시 그의 가정은 부유하지 못했다. 이로부터 5년 후에 그는 링컨 대학의 특대 교우생으로 뽑히어 금전상의 어려움은 면하게 되었다.

1725년 웨슬레의 나이 22세 되는 원기 왕성하고 발랄할 때 그의 생애에 커다란 전환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이때에 자신의 장래에 대하여 번민하게 되었고 또한 심사숙고한 끝에 성직을 맡기로 결심하기에 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아직도 신의 불꽃이 희미하였으며 영적 경험을 사모하는 마음이 적었다.

그가 감명을 받은 책은 토마스 아켐피스(Tomas a Kempis,1380∼1471)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테일러(Jeremy Taylar,1613∼1677)의 "거룩한 삶과 죽음"이라는 책과 로우(William Low,1686∼1761)의 "중대한 부름"이라는 책과 "그리스도인의 완전론"이란 명저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또한 이러한 것들의 영향으로 1725년에 웨슬레는 그의 모친과 함께 "예정설"을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요한 웨슬레가 안수 받아 집사가 된 것은 1725년 9월 19일 주일 옥스포드에 있는 크리이스 처치 교회당에서 옥스포드 감독 요한파터에게서였다. 1726년 3월 17일 웨슬레는 링컨 대학의 특정 장학생이 되었다. 이로부터 25년 이상을 이 대학교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지냈다. 웨슬레는 또한 면학가였다. 링컨 대학에 있으면서 히브리어, 아랍어, 라틴어, 논리학, 윤리학, 철학, 물리학, 웅변학, 시가 신학등 그의 연구 방면은 상당한 범위에 걸쳐 있었다. 또한 그는 그 당시 웅변가로서도 상당한 명성을 떨쳤다.

1729년 웨슬레는 옥스포드 대학의 부름을 받아 다시 모교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당시에 그의 동생으로 챨스 웨슬레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웨슬레는 찰스와 함께 옥스포드 등에서 신성 클럽을 만들어서 성경 읽기를 구휼 운동에 참여했다.

감리회의 창설을 말할 때 요한 웨슬레를 생각하나 찰스 웨슬레의 공적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웨슬레는 처음부터 재능과 재질과 그의 영성을 인정받아 이 단체의 회장으로 취임되었다. 이들의 최초의 사업은 성경 연구였다. 이들은 일명 "신성구락"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리만큼 신앙의 경건함을 중시하였다. 이들의 모임은 보통 다음과 같은 일을 했다. 첫째 희랍어 고전문학을 연구했고 성경 공부를 한 뒤 간단한 저녁 식사로 모임을 마치곤했다. 이들의 첫 열매는 "구휼운동"이었다. 옥중의 사람들에게 부채자들에게 병자들에 그밖에 여러 가지 봉사 사업에 노력하였다.

이 작은 단체는 비록 해산되어 그 존재는 사라졌으나 성실과, 높은 이상과, 신의 은총을 겸한 이 세 청년 즉, 웨슬레 형제와 휫필드의 신앙과 생활은 처음에는 한 대학을 깨우쳤고, 그 다음에는 영국 전역에 믿음의 불을 일으켰고, 나중에는 바다를 건너 북미 대륙과 전세계에 거룩한 신의 불꽃이 일게 하였던 것이니, 이 불꽃이 처음 반짝인 곳은 경건한 청년 몇이 뜻을 합하여 모였던 신성구락부(The Holy Club)였다.

1735년 4월 25일 웨슬레의 부친인 사무엘은 72세의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사무엘이 죽은 이후 엡윗교회의 목사직을 웨슬레가 맞았으나 끝까지 하지 못하고 더욱더 큰 꿈을 앉고 옥스포드로 돌아오게 되었다. 옥스포드로 돌아와 웨슬레는 동생 찰스 웨슬레와 휫필드(1714∼1770)와 함께 또다시 강력한 신앙의 불꽃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또한 1735년 10월 18일 오글레돕 장군과 함께 220톤의 "시몬즈"호를 탔다. 이때부터 그의 해외 선교는 시작되게 되었다.

첫번째 그의 해외 선교는 처음에는 좋았으나 착수한 지 만 2년이 좀 지났을 무렵 그에게는 불행한 연애 사건이 생기어 이 사건과 함께 1735년 12월 2일 캐롤리아로 가는 2,3인의 친구를 동반하여 귀국의 길을 떠났다. 그리하여 1738년 2월 1일 웨슬레는 본국에 도착했다. 결론적으로 웨슬레의 조지아(Georgia) 선교는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조지아 선교의 일이 그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경험이었다. 그의 조지아 선교는 또한 여러 면에 있어서 많은 유익을 끼쳤으니 뒤에 오는 선교사들에게 겸비한 마음과 굳건한 의지를 가질 수 있게 한 점이라든지, 휫필드로 하여금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가 유력히 일할 수 있는 충동을 준 것이라든지, 뒤에 오는 카톨릭 선교사를 선도하여 북미 대륙에 동 교회를 설립함에 실패가 없게 한 점 등은 다 웨슬레 선교가 끼쳐 준 공헌이다.

그는 조지아 선교 후 휫필드의 경험을 살려서 야외 설교에 박차를 가했다. 이후 웨슬레는 브리스톤에서의 전도 활동에 큰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야외 설교에 참여한 많은 신자들은 웨슬레의 설교를 듣고 울부짖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는 이도 있었고 심한 경우에는 실신하는 이도 있었다.

물론 케이커 교도들은 이러한 현상을 조소적인 태도를 가지고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모두 성령에 인도하심에 의해서 이루어 졌음은 말할 것도 없는 사실이다. 웨슬레는 그 당시 영국 교회로부터 이단자라는 격렬한 말을 들었다. 하지만 웨슬레는 끝까지 자기는 영국 교회에서 분열되어 나오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또한 영국교계에서는 웨슬레를 비난하는 공경하는 소책자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웨슬레는 끝까지 믿음으로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또는 자기는 사람들의 명령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의무가 있다고 말하면서 또한 유명한 "온세계는 나의 교구이다."라는 말을 힘차게 역설했다. 그의 말대로 웨슬레는 1724년부터 런던, 브리스톨, 웨일즈, 뉴케슬 등지를 순회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의 소식을 전하였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어렸을 적부터 정신적인 지주가 되셨던 수잔나 웨슬레는 위대한 종교 운동가를 낳고 길러낸 일 이외에도 웨슬레와 함께 전도 사업에 자기 몸을 헌신하였다. 또한 가난한 살림살이와 수다한 자녀들로 더불어 파란 많은 생애를 살다가 1742년 7월 23일 73세의 일기로 영원한 안식의 나라로 떠났다.

웨슬레의 전도와 설교는 결코 간단하고 손쉽게만 진행되지는 아니하였다. 도중에 많은 폭도들로부터 습격을 당하는가 하면 돌팔매질까지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악랄하고 과격한 폭도들까지도 웨슬레의 기도와 설교를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둘씩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실로 이러한 일들은 웨슬레를 통한 성령의 역사가 아닐 수 없었다.

또한 감리교 사에 있어서 저 유명한 그의 신도회(Society)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이고 상호 유기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하였기에 이 체계는 오늘날까지도 감리교회에 존속하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속회(Class meeting)이다. 이 속회 제도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1742년 브리스톨에서였다. 속회는 한 신도회를 보다 작은 단위의 집단으로 나누어 거기에 지도자 한사람 씩을 두어 지도 감독하게 한 것이다.

또한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전도인의 기본적인 성격은 물론 신앙이다. 하지만 지식의 함양도 전도인에게 있어서는 빼놓을 수 없는 기본적인 성격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리하여 1766년 리쯔회의에서는 '가장 유익한 것은 서적을 읽는 것이며 ……… 꾸준한 노력으로 아침 시간을 독서에 쓰라. 24시간 중에 적어도 5시간을 독서에 쓰라………독서에 취미를 기르라. 그렇게 못하겠거든 전도 사업을 그만두고 그대의 원직업으로 돌아가라'고 독서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또한 웨슬레가 말한 전도자가 갖추어야 할 점은 첫째 금·은등을 절대로 받아서는 절대로 안된다.라고 강력하게 역설하였다. 이렇듯 웨슬레는 그의 종도사업에 철저한 강령을 만들었다.

1769년에 북아메리카에 메도디스트교회를 창설하였는데 그때 나이는 이미 70고령에 이르렀다.

요한 웨슬레가 70의 고령에 이르렀을 당시 그는 노드경에게 자기는 매년 5천 마일의 여행을 하였으며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물론 웨슬레의 여행은 대개가 馬上旅行이었다. 그는 습관처럼 항상 말 위에서도 독서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길로 그에게 있어서 마상 여행은 즐겁고 낭만적인 여행은 결코 아니었다. 때로는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고 또한 매섭고 세찬 바람에 살을 에인적도 있었고 눈으로 뒤덮인 산을 넘다가 눈구덩이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웨슬레는 전도자나 설교자로서도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한 사회 사업가로서 저술가로서도 재주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70세의 고령의 나이로도 쉬지않고 주를 위해 끝까지 일을 했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주를 위해 헌신하였다.

1791년 3월 2일 오전 6시 88세의 생을 일기로 영원한 안식의 나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가 심혈을 기울여 쌓은 탑은 해와 달과 더불어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요, 그의 위대한 정신은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여러 백만의 교도의 머리 속에 또한 가슴과 마음속에 오고오는 세대와 함께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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