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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에 대하여

진정한 기독교 - 존 웨슬리

관리자 2013.01.15 13:50 조회 수 : 9671


진 정 한  기 독 교


                                                                                                -  존 · 웨 슬 리  -
                                                                                             김  원 경 목사  옮김


누가 그리스도인이며, 참된 기독교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관하여 너무나 오랫동안 수많은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이 논쟁의 요지는, '누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며, 무엇이 진정한 기독교인가'였던 것입니다. 진정한 기독교란 무엇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게 하는, 가장 확실하고도 가장 접근할 만한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러한 논쟁이 끝나기를 바라서, 이러한 문제들을 하나 하나 고찰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 누가 그리스도인입니까? 이 용어는 무슨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까? 이 말은 너무 오랫동안 함부로 사용되어 와서, 별 뜻이 없게 보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이 말은 가장 사악한 위선과 가장 탐욕스러운 부도덕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 왔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인간 본질에 치욕이 될 만한 사람들의 손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구출해 내야할 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그 이름을 올바르게 소유한 자란 과연 어떤 양식의 사람인지를 분명히 보여 주어야 할 때가 바로 이 때입니다.

Ⅰ.  참된 그리스도인

1. 참된 그리스도인은 겸손해지지 않고는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땅 위에 사는 인간과 하늘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 사이의 거리감을 그는 깊이 느낍니다. 자신이 정말 미미한 존재임을 알고서,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그는 무릎을 꿇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하찮음, 무지함, 그리고 어리석음을 그는 의식하고 있습니다. "오 하나님, 인간은 무엇입니까? 나는 무엇입니까?" 하며 그의 마음 속으로부터 북받쳐 올라 외칠 수 있는 이가 참된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존재와 이에 따르는 모든 축복을 위해, 선(善)하신 아버지께 의존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감지합니다. 그가 소유한 모든 자연적인 그리고 모든 도덕적인 재능의 덕을 그는 하나님께로 돌립니다. 흔히 부나 지혜, 용기, 공로로 귀결되는 모든 것들을 그는 하나님의 소유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인내하면서 뿐만 아니라 감사에 넘쳐서, 하나님의 뜻으로 보이는 것은 어느 것에든 그는 기꺼이 응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의 존재의 모든 것,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지혜로우시고 은혜로우신 처분에 기꺼이 내어 맡깁니다. 그의 마음의 지배적인 소원이란, 전적으로 순복하는 가운데 그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께 가장 애정이 깃든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감사에 넘치는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존경심을 창조하며 또한 조금이라도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 드릴 어떤 성향, 행동, 말, 혹은 생각도 허락지 않을 열렬한 소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의 생명, 호흡, 그리고 모든 것의 소유자이신 그의 사랑하는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를 그는 끊임없이 바랍니다.

2. 이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향한 가장 강한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든 선의 원천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갖습니다. 기쁨이나 고통, 삶이나 죽음 그 어떤 것도 흔들 수 없는 믿음을 그는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뢰는 나태함이나 게으름을 일으키기는커녕, 가장 왕성한 근면으로 그를 내몹니다. 이 믿음이 그를 그의 모든 힘을 다해 하나님께 복종하게끔 합니다. 고로 그는 결코 마음이 나약해 지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바를 행하는 일에 그는 결코 지치지 않습니다. 가장 받으실 만한 예배란 하나님을 닮는 것임을 그는 알고 있으므로, 본받을 만한 하나님의 모든 완전을 자신 속에 옮겨 놓으려고 그는 끊임없이 힘을 씁니다. 특별히 그는 하나님의 정의, 긍휼, 진리를 나타내려고 애를 씁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기억하면서, 그리스도인은 같은 모습(likeness)이 됩니다. 그는 그의 이웃에 대한 사랑, 즉 한 파벌이나 당파에 고착돼 있지 않는 우주적인 사랑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의 사랑은 사사로운 의견들이나 예배형태에 있어 그와 뜻을 같이하는 이들에게로 제한되지는 않습니다. 그 사랑은 혈연이나 결혼에 의해 그와 관계되는 사람들을 위해 예비된 것이 아닙니다. 그를 사랑하는 이들이나 혹은 우정으로 인해 그로부터 사랑 받는 사람들을 위해 그 사랑이 보존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사랑은 온 피조물에 미치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닮았습니다. 그 사랑은 모든 인간의 경계선을 넘어 치솟아, 이웃과 문외한들, 친구와 원수들까지 포용합니다. 선량하고 점잖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불순종하고, 악하며, 감사할 줄 모르는 이들에게도 이 사랑은 주어집니다.
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사람들 하나 하나를 다 사랑합니다. 어떤 장소나 어떤 나라에 속하였던 간에, 그는 인간이 낳은 모든 자녀들을 다 사랑합니다. 그의 우주적인 사랑은 그의 특별한 사랑에 지장을 주지 않습니다. 그는 그의 친척, 도움을 받는 사람들, 친구들, 그리고 그의 조국을 향한 각별한 사랑을 지속합니다.
모든 인류를 위한 이 사랑은 그 자체에 있어 관대하며, 사심이 없습니다. 자신의 이익의 관점에서 보지 않으며, 이득 혹은 칭찬을 고려한 동기를 지니지 않습니다. 이 사랑은 사랑하는데서 비롯된 즐거움조차 무시합니다. 사회적 사랑, 만일 그것이 이웃사랑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자기-사랑(가장 허용할 만한 종류의 것이라 하더라도) 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그리스도인은 경험에 의해 압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지도하심을 받는다면, 서로 간의 사랑은 상대방에게 힘을 더하여 주어서 결국 그들이 합쳐져 결코 나뉠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스도인은 확신합니다.

3. 이 우주적이며 사심 없는 사랑은 모든 올바른 감정을 산출합니다. 그 사랑은 친절함, 부드러움, 달콤함, 인간애, 예절 바름과 상냥함을 낳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모든 사람들의 덕행(virtues)을 보고 기뻐하게 하며, 그로 그들의 행복의 한 부분을 경험하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 사랑은 모든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그들의 연약함을 동정하도록 그리스도인을 돕습니다. 이 사랑은 겸손과 겸양, 신중함, 평온함, 성품의 평정을 창조합니다. 이 사랑이 질투심과 의심이 없는, 관대함과 개방성과 솔직함의 근원입니다. 이것은 순수함을 산출하고, 또한,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며 우호적인 것은 무엇이나, 믿고 바랄 수 있는 자발성을 불러일으킵니다. 뿐만 아니라, 악에 의해 결코 정복당하지 않고 오히려 선으로 악을 정복하는 엄청난 인내심을 그 사랑은 촉진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사랑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진리에 대한 확고한 생각, 완전한 단순성 그리고 참된 성실성을 가지고 사귐을 갖게끔 합니다.
진실로, 그리스도인은 그 속에 간계가 없습니다, 그는 단지 정의와 진리에 반대되는 모든 표현을 삼가는데 단순히 만족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있던 없던, 그는 사랑 없는 모든 말을 안하려고 노력합니다. 그의 모든 교제의 목표는 지식과 덕으로써 자신을 개선하는데 있든지, 아니면 그가 사귀고 있는 사람들을 예전보다 더욱 현명해지고, 더 나아지고, 더 행복해 지도록 만드는 데 있습니다.

4. 이같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모든 올바른 행동을 산출합니다. 그 사랑은 모든 사회적 책임을 열렬하고도 견실하게 이행하도록 그리스도인을 지도합니다. 그는 그와 관련된 어느 것에서나 온 정성을 다합니다. 그는 그의 친구나 그의 국가 그리고 그가 속해 있는 어떤 특별한 공동체에 대한 그의 의무를 완수합니다. 그와 같이 몰두하는 정신은 어떤 이를 해치거나 슬프게 하는 일을 기꺼이 막아버립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그로 하여금 정의와 자비를 고르게 실천하도록 인도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가능한 모든 선을 이행할 것을 그에게 요구합니다. 이 사랑은, 삶의 모든 처지에서, 만일 그가 꼭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면 그 때에 남들이 그에게 해 주기 바랐을 그것만을 남들에게 행하도록 그를 꾸준히 헌신케 만듭니다.

5. 그리스도인은 남에게 손쉬운 존재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역시 손쉬운 존재입니다. 그는 교만, 분노, 그리고 격렬하고 불규칙한 아집으로부터 자유합니다. 그는 더 이상 질투나 악의 혹은 불합리하고도 고통스런 욕망에 의해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더 이상 감각적인 쾌락의 노예가 아니며, 지금은 그의 몸과 마음을 다스릴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인생역정을 계속해서 차분함과 절제와 순결함으로 즐겁게 엮어 나갑니다. 그는 모든 것을 적소에 사용할 줄 알고 있으며,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상상의 저급한 쾌락을 딛고 일어섭니다. 그리스도인은 더욱 영구적인 쾌락을 갈망합니다.
그는 결코 평판의 노예가 아닙니다. 세상적인 갈채는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는 마음이 요지부동입니다. 그는 아무 칭예도 구하지 않기 때문에,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비난이 그를 괴롭히지 않는 것은, 자신이 고의로는 죄 지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것들의 주님이신 분으로부터 인정받고 있음을 압니다.
또한, 그는 궁핍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 땅덩어리와 그 땅의 소산이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는지를 압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어떤 이에게 그 필요한 것을 주시는 것을 하나님께서 꺼리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압니다.
그가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그에게 진정 유익이 되지 않는 한, 고통은 허락되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보내졌을 때에, 과거에서처럼 그 고통을 견딜 힘을 지니게 될 것을 그는 압니다.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으로 더불어, 그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썩지 않고 불멸할 몸으로 부활하기까지 그 부패할 몸을 먼지 속으로 떠나 보내는 것을 그는 기뻐할 것입니다.
영예로움 가운데 있든 수치가운데 있든, 풍족하든지 궁핍하든지, 평안하든지 고통 중에 있든지,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에 만족하며 감사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6.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기에 행복합니다. 그의 하나님은 이해력이 뛰어난 신이시며 만물의 주가 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이 맹목적인 우연이나 냉혹한 필연성의 산물이 아님을 압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지혜로우신 분이심을 충분히 확신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인은 행복해 합니다. 그가 확신하기는,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을 지니셨기에 그 분의 모든 지혜로운 계획을 실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가 알기는, 하나님은 무한히 선하셔서 그 분의 모든 능력을 그 분의 모든 피조물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펼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변의 정의, 그 분 자신 안에서의 모든 충분성, 그리고 흠잡을 데 없는 하나님의 완전함을 숙고해 보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행복을 끊임없이 증가시킵니다.
그 외로 더 많이 받은 축복은, 그가 그의 존재를 깊이 생각해 볼 때, 그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 줍니다.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모든 세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손으로 이루신 모든 것들을 계속해서 돌보고 계심을 알고 그는 기뻐합니다. 이렇게 기뻐하면서, "오 주님, 온 세상에 있는 당신의 행적은 얼마나 놀라운지요. 당신께서는 하늘들 위에 당신의 영광을 두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가운데, 그는 마음 속으로부터 사랑과 찬양이 터져 나옵니다.
마치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것을 잘 다스리시는 것 같은 주님을 그는 눈으로 봅니다. 그는 온 피조물 위에 펼쳐 있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지켜봅니다. 즐거운 관객으로서, 그는 모든 것들 안에 있는 이러한 섭리의 결과들을 바라봅니다. 특이한 모든 존재들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총체적인 통치의 지혜와 선하심을 그는 살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한 인간이 온 우주인양 모든 사람을 하나 하나 살피시면서, 한 사람에게 하시듯 온 우주를 주재하신다는 것을 그는 압니다. 그의 삶 내내 그에게 있었던 선하심의 여러 가지 흔적을 돌아볼 때, 그는 깊은 감동을 느낍니다. 그가 경험했던 모든 것은 숫자나 무게나 단위로 일일이 다뤄질 수 없음을 그는 압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고찰해 봄으로 해서, 영혼의 승리감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모든 행동이 결국 영원에 이르게 되는 것임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유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그를 각별히 사랑하신다는 뚜렷한 확신에서 옵니다. 그의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항상 그와 함께 계십니다. 한 순간도 하나님은 결코 그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늘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음과 지상에서 그가 바랄 것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그는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당신의 형상을 새겨 넣으셨음을 그는 너무도 잘 압니다. 그의 육체와 그의 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그는 원합니다. 머지 않아 그는 죽을 것이고, 게다가 하나님의 팔에 안겨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죄와 고통을 떠나게 될 때에 그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는 마음이 흥분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명백하고도, 꾸밈이 없는 그대로의, 진정으로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차분한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 이상의 바람직하거나 사랑스러운 특질을 생각해 낼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이러한 특질의 소유자가 되길 바랍니까? 당신은 여기 표현된 사람과 조금이라도 비슷합니까? 당신이 그와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당신은 압니까? 만일 당신이 그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만일 당신이 전적으로 그러한 사람이라면, 당신은 그 이름에 어울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Ⅱ.  진정한 기독교

1. 참된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이처럼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진정한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고려할 수 있게 됩니다. 진정한 기독교란 교리의 체계나 조직이라기 보다는 영혼의 한 원리입니다. 전자의 의미로 볼 때, 기독교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특질을 묘사하는 교리의 체계입니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 같은 특질이 주어질 것임을 약속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획득할 방법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모든 부문에서 그리고 가장 생생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인의 특질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의 핵심들은 구약의 여러 곳에서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요지들은 신약에서 완성되었는데, 그것도 다시 다뤄지고 마무리된 하나님의 업적으로서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이나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서 이러한 요점의 개요들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특질이 당신과 나의 것이 될 수 있다고 약속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획득할 때까지 안주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구약과 신약에 이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신약은, 결국, 모두가 한 약속입니다. 신약에 있는 기독교에 관한 모든 묘사 역시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지시를 따르는 한 명령입니다 ;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약속들을 유업으로 받을 자들을 본받는 자 되시요." 모든 명령은 한 약속을 강요합니다.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하리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쓰여진 이 말씀은, 내가 해야 할 것을 지시하신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하실 것에 대한 약속인 것입니다. 그 말씀은 구약에 기록된 말씀과 정확히 같은 뜻의 표현인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이러한 특질이 정말로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은, 신약을 주의 깊게 읽는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관찰될 뿐 아니라 쉽게 드러납니다. 이러한 특질은 복음의 모든 묘사나 명령 하에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어떻게 믿음으로 이 약속들에 도달할 수 있는 지를 말해 줍니다.

2. 이 믿음은, 말들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은, 단순한 한 의견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비록 그 의견들이 참되다 할지라도, 일련의 많은 의견들은 아닌 것입니다. 꿰인 구슬이 기독교인의 거룩함이 아닌 것처럼, 꿰어 놓은 의견들이 기독교인의 믿음은 아닌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믿음은 어떤 의견에 대한 동의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세개 혹은 스물 세개의 신조에 동의할는지 모릅니다. 그가 이해하는 한에 있어서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에 동의할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에게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복음에 대한 믿음이란, 불멸의 성령께서 사람의 몸 안에서 행하신 능력이란 말로 표현됩니다. 믿음이란 영의 세계, 즉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간파하는 능력입니다. 믿음이란 육적인 감각에 의해서는 감지되지 않는 것들을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바로 적절히 이해된 그리스도인의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의 사역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화해되었다는 - 우리 마음에 주어진 신적인 증거 혹은 확신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위하여, 은혜로우셔서 우리와 화목하신 아버지께 서로 떨어질 수 없도록, 우리가 연합되었다는 확실한 신뢰인 것입니다. 특히,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원한, 모든 좋은 것들을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연합되어 있습니다.
만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을 감지하는 것만을 위해서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얼마나 바람직합니까? 모든 생각할 줄 아는, 사려 깊은 모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모든 것들에 대해 더욱 광범위한 지식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에 관한 커다란 확실성과 그것들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그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은 영원으로부터 빛을 들어오게 할 수 있는 열려진 창문을 원하지 않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하나님이 그렇게 불확실하기 때문에 불안해합니다. 물질적인 것에 비해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이 그에게 너무 적음을 인간은 인지하고 있습니다. 희미하고도 어렴풋이 보고 있음을 그는 깨닫고 있습니다. 그것이 불완전하며 분명히 감지할 수 없기 때문에, 신에 관한 그의 견해는 더더구나 수수께끼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영원한 세계를 파악하려는 인간의 갈망을 충족시켜 줍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에 관한 더욱 광범위한 지식을 사람에게 제공합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가장 충만한 확실성과 증거로써 지금까지 눈으로 보지 못하였고 귀로 듣지 못하였으며, 가장 밝은 빛 속에서도 마음으로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사람들에게 알게 해 줍니다.
이런 특혜를 알진대, 누가 그러한 믿음을 바라지 않겠습니까? 믿음에 의해 이러한 지각에 도달할 뿐만 아니라 거룩함과 행복의 약속이 성취되는 데에도 이르게 됩니다.
모든 기독교인은 믿음이 그와 같은 것임을 발견하며 또한 그들이 믿음을 증언할 수 있다는 것을, 기독교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믿음을 통하여 이러한 것들이 그와 같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서 그것들을 체험합니다. 기독교가 약속하는 것이 우리 영혼 속에서 성취됩니다. 그것은 복음서에 약속된 모든 내적인 원리들의 완성입니다. 그것은 거룩함과 행복이며, 우리의 영혼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에로 솟아오르는, 평강과 사랑의 원천입니다.

3. 이 믿음은 참된 기독교의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역사적 전통이나 증거를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증거는 나름대로의 위치와 적당한 존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증거는 결코 우리 자신의 마음의 체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인 증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약화되었다고들 일반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여러 시대를 지나는 동안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채색되었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도 마음의 이 내적 증거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2000년 전에 그러했던 것만큼, 지금도 강력하고 새롭습니다. 그 믿음은, 처음에서와 같이,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옵니다. 세월이 결코 이 흐름을 고갈시킬 수 없습니다. 이 흐름은 결코 끊기지 않을 것입니다.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증거는 아주 복잡한 성질의 것입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많은 그리고 여러 가지의 고려사항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깊은 연구와 이해력의 소유자들만이 그 증거의 충분한 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마음의 경험은 얼마나 평범하고 단순한지요. 그것은 가장 낮은 지적 상태의 수준에까지 도달합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내가 아는 것은 한 가지, 내가 눈멀었었지만 지금은 내가 본다는 사실입니다."
마음 속에 살아 있는 믿음은 너무나도 명백한 하나의 논증이기에, 누구라도 그 믿음의 충만한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기독교 증거는 저 멀리에 서 있습니다. 그 증거가 떠들썩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말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강력한 인상을 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너무 오래된 시간과 장소에서 수 세기에 걸쳐 왔던 것을 우리에게 설명해 줍니다.
이에 반하여, 내적 증거는, 언제 어디에 있던지, 모든 사람에게 즉각적으로 나타납니다. 이 증거는 당신 곁에 있습니다. 만일 당신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이 증거는 당신 맘 속에 있습니다. 바로 이 속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그의 아들, 예수 안에 있습니다.
만일 모든 역사적 증거를 없애는 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이 내적 증거를 지닌 그리스도인은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서 있을 것입니다. 그는 그의 주위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기독교에 관한 나의 내적 증거를 해칠 수 없습니다. 독재자가 순교자의 영혼을 해칠 수 없었듯이 말입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그 외적인 기독교의 증거가 희미해지고 방해받는 것을 허락하신 것 같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외적 증거에 의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그들 맘 속에서 빛나는 빛을 증언해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기독교의 전통적인 역사적 증거에 대항하여 모든 종류의 반대 이론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신 듯합니다. 지식과 지혜 있는 사람들이 그 역사적·전통적 증거를 포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증거를 계속해서 옹호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논증을 그 역사적 증거에 의존할 수 없음으로, 그들은 그들의 믿음에 관한 더욱 깊고 더욱 견고한 지탱근거를 찾지 않으면 안됩니다. 살아있는 믿음의 내적 증거 없이, 그들은 오랫동안 그들의 주장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들이 살아있는 믿음의 내적 증거를 얻지 못한다면, 그들은 싸움에서 패할 것입니다. 그들이 확신시키기 원했던 사람들은 짧은 시간 안에 길을 잃고 이신론(理神論)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4.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믿음이나 사랑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살아있는 믿음의 내적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속죄 피를 통한 이런 관계 안으로 들어 온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 삶의 모든 처지에서 만족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궁핍하거나 고통 당하거나 죽을 때조차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거룩하지 않습니다. 자만과 분노와 어리석은 욕망을 초월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생활이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현대 기독교는 약간의 외적 준수를 갖춘 가운데 사사로운 의견들에 화제의 촛점을 맞춥니다. 많은 불가지론자들이 이런 자칭-그리스도인들 보다 더 심오한 도덕성과 정직성을 반영해 줍니다.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기독교라 일컫는 그 보잘것없는 미신으로 해서, 부끄럼을 당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죽은 기독교 그리고 영과 믿음과 사랑이 없는 그들의 공허한 형식으로 인해서 그들이 조롱 받게끔, 이성(理性)이 사용될 수 있습니다. 만일 밖으로 내 보이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 마음 속에 없다고 한다면 종교적인 겉치레란 정말로 하나님께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임을, 이성은 그들에게 확신시킬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이 의식(儀式)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시도하는 동안은 그들은 단지 허공을 치고 있다는 것을, 보통의 이해력을 지닌 사람들조차도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불가지론자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사람들을 정복할 때까지 그들의 승리를 외치며 밀고 나아갈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이 알고 있지 못한 하나님께서 그의 전능한 사랑 가운데 일어 나셔서, 모든 의심자들의 마음을 정복합니다.)
오,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은 그 때가 지금이기를 얼마나 바라는지요. 모두가 다 그 위대하고도 소중한, 내적인 산 믿음에 참여하기를 그들은 얼마나 갈망하는지요. 다른 이들이 기독교란 용어를 어리석게 사용하는 것을 들을 때,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요. 사람들이 가장 깊은 지혜와 지고한 행복을 지니신 성령님을 광신으로 부릅니다. 참된 기독교를 무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참된 그리스도인 이외의 눈에는 경멸적이겠지요. 참된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경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듯, 그는 의심하는 이들을 사랑합니다.

5. 내적 기독교는 그것을 받아들인 자들에게만 영향을 미친다고 어떤 이들은 솔직한 이의를 제기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내적 기독교는 우선 그것을 받아들인 이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만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사물의 본질상, 그 내적 기독교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강한 증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내적 기독교는 어느 정도의 증거를 가져올 수 있고, 다른 이들에게 얼마간의 진실을 나타내 줄 수 있습니다. 이것에 관하여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참된 기독교가 적절히 이해될 때에, 당신은 참된 기독교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볼 수 있습니다. 참된 기독교와 비교해 볼 때, 바람직한 것이란 아무데도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참된 기독교를 약속하고 있고 또 그것이 믿음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다음으로는, 기독교의 본질적 가치 때문에 기독교인의 믿음이 얼마나 바람직한지를 사람이 명확히 볼 수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덕과 행복에 도달하려고 힘을 쓰면 쓸수록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의하지 않고는 그것들이 획득될 수 없음을, 당신은 더욱 더 확신케 될 것입니다. 당신의 개인적 경험이 충분한 증거입니다. 이 증거를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없습니다.
끝으로, 만일 당신이 살아있는 믿음의 내적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은 데, 이러한 기독교의 덕의 어떤 것을 획득할 수 있다고 당신은 확신할 수 있습니까?

자 이제 우리는 유용한 내적 증거로서의 이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과거엔 불행했었지만, 지금은 행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진리의 강한 증거입니다. 이것이 한 개인에 의해 경험될 때까지, 타인들의 경험도 유효한 증거만큼 강력합니다.
당신이 지금 보는,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당신의 증거로 의지하시요. 그러나 그들이 견지하는 의견들을 의지하지는 마시요. 이 점을 놓치지 마십시요.
성경이 약속한 바를 참된 그리스도인은 소유하고 있고 즐기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살아있는 믿음이 무엇을 행했는지를 볼 수 있으며, 그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모든 이들은 고백할 수 있습니다. 능력과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살아있는 믿음의 소유자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수 세월을 통해 그 분이 그렇게 하셨듯이.

미들튼 박사에게.   1749년 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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