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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에 대하여

감리교회의 처음 선교사인 아펜젤러, 스크랜튼 부부, 스크랜튼 대부인은 고종께서 윤허하신 대로 미감리교회의 파송을 받아 교육사업과 의료선교를 한국에서 시작하였다. 사범학교와 일반대학 및 드류신학교를 졸업한 젊은 선교사 아펜젤러는 의술을 배우려고 스크랜튼에게 찾아온 학생들을 위한 영어교육을 하면서 1886년 6월 서울에 "배재학당"(전 배재고 터 - 현 고덕동으로 이전)을 정식으로 시작하였다. 이 학교의 명칭은 고종께서 하사하셨고, 공적으로 인정받는 학교가 되었으며, 이 곳을 졸업한 이들은 정부의 공무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한편, 스크랜튼 대부인은 1885년 10월 정동에 선교부지를 마련하고 여학당과 사택을 마련하여 "한국의 부녀자들이 보다 좋은 한인이 되며, 한국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을 통하여 훌륭한 한국"이 되게 하자는 목적으로 시작하였다. 또한 왕비께서 "이화학당"(현 이화여고 터)이란 이름을 지어 보내주었으며 점차 성장하기 시작했다.
1888년 내한한 올링거 목사와 존스 목사는 배재학당에서 가르치며 문서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인천 내리교회의 담임자로 시무하였다. 1893년 인천에서 아펜젤러에 의해 시작된 어린이 매일학교로 시작된 교육사업은 남녀 공학의 영화학당(현 영화초등학교)으로 성장하여 존스 부인이 그 학교를 담당하게 되었다. 서울과 인천 및 평양 지역을 순회하며 신학교육을 하던 신학회는 배재학당 내에 신학반을 두어 운영하였다. 특별히 감리교의 신앙 교육은 사회적 복음으로 확산되어 문명 부국에 대한 사상, 애국정신, 문화적 토착화에 힘쓰는 교회로써 사회에 이바지하고자 했다.
특별히 청년운동은 주일학교 운동과 엡웟청년회 운동을 통하여 전개되었는데, 주일학교에서는 성서연구를 중심으로 기독교 교육을 가르쳤으며, 엡웟청년회는 1) 경건한 신앙훈련, 2)교육활동, 3)선교와 4)사회봉사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들을 지도하고 프로그램을 운영한 이들은 목회자들과 독립협회의 중심인물인 서재필, 윤치호 등이었다. 윤치호는 밴더빌트와 에모리에서 신학과 일반학문을 수학한 첫 신학도였다.
서재필은 1895년 귀국하여 아펜젤러 선교사의 집에 머물면서 순한글로 발행한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한국의 사정과 국민의 입장을 알리기 위해 영문판을 감리교 삼문출판사를 통해 발행하였다. 또한 1896년 7월 윤치호,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청나라 시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건립하는 등 자주독립과 내정 개혁을 목적하는 민권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가르치면서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배재학당에서 조직된 "협성회"는 충군애국의 정신을 함양하고, 동창간의 깊은 우애를 심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복음전도와 봉사하는 것을 다짐했다. 당시 임원은 양흥묵, 노병선, 이승만, 윤창렬, 이익채, 주시경 등 이었다. 그들의 토론제목은 주로 국한문 혼용에 대한 것, 신앙의 중요성, 노비제도의 폐지 등이었다. 이러한 그들을 협성회회보를 통해 주간지로 발행하였고, 1898년 4월9일 한국최초의 "매일신문"을 발행했다. 감리교회의 교육 및 청년활동은 이 시기에 세 방향으로 나타났다. 독립협회는 정치적 단체로, 협성회는 계몽단체로, 엡웟청년회는 선교단체였다. 특별히 만민공동회 운동을 통해 내정간섭에 대한 개혁과 자주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으나 수구파의 모략으로 서재필이 추방되어 아펜젤러와 윤치호가 독립신문을 발행, 국민의식을 고양시켰다.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현 YMCA)가 미, 영, 일, 중, 한인들에 의해 창립, 국제적인 성격을 띤 창립총회를 열고 헐버트 선교사를 의장으로 뽑았다. 이사회는 선교사들이 주축이 되었으며, 운영부는 한국인들에 의해 관장하게 되었는데 이 때 지도자들이 윤치호, 이상재, 최병헌 등이었다. 이외에도 배화학당 및 평양 광성학교, 정의여학교, 영명학교, 인천 송도학원 등을 건립하여 교육사업에 진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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