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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에 대하여

1945년 포츠담 선언이후 8월 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위력을 체험한 일본은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2차대전은 종막을 내렸지만 38선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38선 이북은 조선공산당에 의해 그리고 남쪽은 미국의 군정 하에 제헌의회가 구성되고, 단독으로 이승만 정부가 세워졌다. 이에 반대한 김구와 김규식에 의해 통일민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공산정권에 의해 이용당하였다. 해방후 교회는 단일교회를 출범하려 했으나 일제시대의 잔재가 남은 교권에 반대하여, 각 교파로 환원 독립하여 분열하게 되었다.
또한 이데올로기의 갈등으로 분단된 한반도의 미래는 6.25 동란이란 결과를 가져왔다. 서울의 정동교회에서는 인민군들의 공포분위기 속에서도 예배를 강행했다. 해방 후 감리교회청년회는 지역별로 청년회 재건 사업에 나서 1949년에 청년회 헌장을 발표하며 재조직되었으나 전쟁으로 인해 제대로 움직되지 못하다가 1954년 공주영명학교에서 모였던 하기 수양회를 시발로 다시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감리교회청년회의 목적은 "남녀기독 청년의 신앙과 성결의 생활을 돈독 향상케 하며 지.덕.체의 교양과 봉사와 친목의 정신을 함양하여 본 교회에 헌신하게 함"이었다. 1952년 김광우 목사는 세계기독교교육대회를 다녀와서 청장년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영상매체와 음성매체를 사용한 교육 등을 설명하며 새로운 교육의 가치관을 심어줌으로써 한국교회로 하여금 앞서가는 교육기관이 되도록 이끌어 전후 교회는 점차 발전하였다.
1954년 중부, 동부연회의 결의로 대전신학교 전수과를 설립하여 농촌교역자 양성하자는 취지로 시작한 대전신학원이 1960년 총리원 이사회의 결의로 감리교 대전신학대학(현 목원대학)으로변경하고 문교부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1955년에는 기독교교육자 전국 하기연합대강습회를 열고 유년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함께 나누었다. 이 강습회는 현대교육의 첨단을 걷고 있었다. 그 내용을 살려보면, 7부의 지도자과정으로 주일학교, 청년회, 음영교육, 교회학교, 성가대, 오락, 기독교가정에 대한 지도자 교육 및 특강으로 이루어졌다. 감리회보로 발행되던 소식지도 1959년부터는 감리교생활이란 월간지로 제작하여 감리교회의 기관보고 및 각종 소식을 나누게 되었다. 1960년대 초반부터 시청각 교육에 대한 강조로 시작하여 주일학교의 아동교육이 본궤도에 접어들면서 주일학교 전국연합회가 1963년 7월에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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