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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에 대하여

요한 웨슬레의 회심 동기와 체험


1. 웨슬레의 신학적 발전에 끼친 올더스케이트 체험의 의의


1738년 5월 24일 「그날 저녁에 나는 마지못해 올더스케이트(Aldergate)의 거리에서 모이는 집회에 나갔더니 어떤 루터의 로마인서 주석의 서문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9시 15분전쯤 하여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일으키시는 변화를 설명하고 있을 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 한분만을 의지한다고 느꼈으며 그가 나의 구원을 위해 죄를 없게 하시고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하여 주셨다는 확실한 증거를 받았다.」

이상은 웨슬레가 올더스케이트에서의 체험을 자신이 밝힌 글이다.

웨슬레의 생활과 그의 설교가 당시의 영국 국민에게 끼친 영향을 생각할 때 그가 그날로부터 그의 마음 전체를 웨슬레의 종교적 체험과 그의 생활은 물론 그의 사상의 분기점이 된다. 거기서 그는 처음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의 참뜻을 배웠기 때문이다.

올더스케이트가 이에 앞서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에서 웨슬레가 진정으로 배운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믿음을 가지게 될 때 사람은 내증을 얻게 되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 안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지 않고 고의적으로 죄를 범함으로써 그 귀한 믿음을 소멸시킨다면 낮이 있은 뒤에는 필연적으로 밤이 오듯 하나님의 교제는 끊어지게 되고 내증도 가질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2. 웨슬레의 초기 의인관의 붕괴


웨슬레의 초기 의인관을 와해시킨 주요한 요인은 그 자신 안에 있었으며 이것은 불확신, 의심, 때로는 순수한 공포의 형태로 나타났다.

자신의 구원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었으며 영원한 애정도 그 자신의 활동과 자신의 마음의 의향과 자신의 의지력으로 능히 좌우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놓였다고 확신하여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어떤 도덕적인 퇴보나 영적인 패배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자신과 자기 의존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이와같은 믿음의 관점에서 볼 때에 이상을 조금이라도 낮추거나 실제적인 성취를 이룩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비참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구원 자체가 근거한 바로 그 기초를 파괴하여 버리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비와 행위와 경건한 예배를 통하여 이와같은 자신을 언제나 굳게 가졌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다.

조지아 선교시 그는 어떤 어린이에게 세례 베풀기를 거절하였다. 그 이유는 어린애의 양친이 머리에 물을 끼얹는 일에 반대하였기 때문이었다. 물로써 세례를 주는 것은 병자에의 안수를 제외하고는 모든 경우에 있어 행해지는 영국 교회의 법이었던 것이다. 그가 서버나의 어떤 여자에게 반하여 그녀와 결혼하기를 간청한 후에도 그 문제를 모라비안 교회의 장로들에게 물어 보았다. 장로들이 그들의 결정에 따르겠는가 하고 웨슬레에게 물어 보았을 때 그는 그 결정이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하면서 "예, 따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웨슬레는 언제나 자신의 영적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을 가질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영적 발전에 위함을 주거나 방해를 주리라고 생각한 그 어떤 것도 조심스럽게 경계하였다.

그의 미국 항해와 조지아에서의 목사 생활과 아메리카 토인들과의 접촉으로서 그는 비로소 그가 주장한 교리가 부적당함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보라 내가 가난한 사람에게 밥을 주기 위하여 내 있는 힘을 다하였고 모든 사람들보다 더많은 수고를 하였다. 나는 내 친구나 명예나 안일이나 나라까지도 다 내버렸다. 나는 생명을 내걸고 외국 땅을 헤매었으며 몸을 골짜기에 내 맡겼고 뜨거운 열에 태웠고 노고와 피로에 지치고 여위었으며 또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내 몸을 내어맡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들이실까 내가 지금까지 행한 모든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있을까? 은혜 받는 온갖 수단을 언제나 쓴다면 가능할까? 나는 나 자신을 알지 못한다. 내가 사람을 감화시키는 힘이 강하고 도덕적 의는 책망할데가 없는가? 기독교의 모든 진리에 대한 합리적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이 모든 것을 인하여 내가 그리스도 인의 거룩하고 성스러운 특색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까?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요 우리가 율법과 계명을 지켜야 한다면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것이 되고 정당하고 선한 것이 되지만 믿음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배설물과 같은 것이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기에 합당할 뿐이다."

그러면 믿음과 행위가 구원을 얻는 방법이 아니면 그 진정한 방법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방법은 무엇일까?

3. 모라비안 교도의 영향


대서양 횡단 여행을 하는 도중에 웨슬레는 처음으로 모라비안 경건 주의자들과 접촉하였다. 그는 그들의 품행, 겸비, 인내성, 욕설을 참는 마음 등이 매우 신중함을 발견하였으며 특히 용기 있고 아무런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지 않음을 보고 탄복하였다.

웨슬레는 모라비안 교도들이 화평과 즐거움 속에 살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 교회의 원시적 소박함과 그들이 죽음을 태연하게 달게받음을 보았다.

그가 조지아에 도착한 후에 스팽겐베르크(Augustus Gottlieb Spangenberg, 1704∼1792)가 자신의 입으로 그의 옛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하실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無知蒙昧하다. 나는 어린아이다. 내 아버지께서 잘 아시니 그가 부르실 때면 언제 어디라도 갈 각오가 있다."

그가 조지아에 있을 때 스팽겐베르크가 물었다.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성령의 증거를 마음 가운데에 가졌는가? 하나님의 성령은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그대의 영에게 증거 하던가? 그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가? 그대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대를 구원 하셨다는 것을 아는가? 그대는 그대 자신을 아는가?"라고. 지금까지 웨슬레는 자신의 영적 생활의 실태를 이렇듯이 심각하게 검색하는 질문을 받아 보지 못하였다. 이 문답이야 말로 웨슬레의 조지아 선교에 앞선 항해 중에 얻은 최대의 수확이 있다고 할 것이니 스팽겐베르크 목사와의 대화 중에 웨슬레의 마음속에서는 섬광이 한번 번쩍이었다.

그가 영국으로 돌아와서 옥스포드에 있을 때 피터뵐러(Peter Bohler)는 그에게 "나의 형제여 그대의 철학은 더욱 세련되어야 하겠습니다."라고 일러주었다. 그때부터 약 2주일 후에 뵐러는 "믿음을 가질 때까지 믿음을 전하라 그러면 믿음을 얻을 것이니 그 다음에는 그대가 믿음을 가졌으므로 그 믿음을 전할 것이다."고 권면하였다. 영국 교회에서도 역시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공로로 힘입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모라비안 교도들은 이것을 좀더 인격적인 면에서 파악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전체로서의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셨으나 중요한 것은 그가 한 인격으로서 그대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이다."라고 가르친다.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사람이 의로운자로 받아들여지고 죄책에서 자유해졌다고하는 법적인 선고 이상의 것이다. 이제는 죄가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나누어 놓지 못한다. 도리어 죄만이 사람과 하나님의 어린양을 감동시켜 사람을 긍휼히 생각하고 양의 피를 힘입어 사람을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가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심과 동시에 우리를 성화 시키고 모든 불의로부터 우리를 성결하게 하신다. 모든 것은 우리 위에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역사이신 까닭에 우리 자신이 하는 일이란 하나도 없다. 1732년 1월 24일 헌 후드 교회에서 Upper Lusayia의 회장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졌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오신 그리스도만을 언제나 강조하였습니다. 우리가 올바로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이루어지리라는 것만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역설합니다."


4.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


웨슬레는 그의 인격이 여하하고 또 그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겠는지를 자문자답 하기에 지쳐 버린 나머지 하나님께서 구원의 조건을 제시하실 뿐 아니라 인간 안에서 구원을 실제로 이루신다고 모라비안 교도들도 주장한 바 있는 종교 개혁자의 교리에 귀의하게 되었다. 그가 1738년 5월 24일 밤 루터의 로마인서 주석의 서문을 듣고 루터의 사상을 분명히 깨달았다.

그는 언제나 선한 행위를 할 때마다 불쾌한 감을 가지거나 억지로 하게된다는 것을 자기 자신의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기에 사람은 행위를 가지고 결코 선을 쌓을 수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하여서는 다른 곳으로 가서 찾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믿음에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그 믿음은 인간 안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이시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살아 있는 확고한 신념이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하고 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천만번이라도 거기에 목숨을 내걸 수가 있다.

이와같이 하여 웨슬레는 올더스케이트는 중생의 체험을 한지 18일 후인 1738년 6월 11일에 옥스포드 광장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란 제목의 유명한 설교를 하였다. 또한 그가 모라비안 교회의 중심지 헌 후드에서 순례 여행을 끝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바로 그 다음날인 1738년 9월 17일주일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고 죄인들에게 회개할 것을 외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감리교회 부흥 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그 이유는 감리교라는 이름이 1729년부터 웨슬레와 그의 옥스포드 클럽 동료들에게 불리워졌고 후년에 웨슬레 자신도 그 해를 사회적인 현상으로서의 감리교회의 기원 연대로 정하였으나 1738년에 웨슬레가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외치기까지는 감리교회의 세력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거나 혹은 감리교회 회원 외의 사람들에게는 별로 영향 준 바가 없는 하나의 적은 클럽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받을 가치가 있는 한 가지 선행도 할 수가 없고 어떠한 품격도 갖출 수가 없다는 것을 웨슬레는 그의 설교에서 언제나 역설하였다. 죄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역사에서 오는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란 "말로 다 할 수 없는 선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라는 말밖에는 아무런 할 말이 없다. 이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죄를 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위는 행위 자체가 악이다. 이는 썩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힐 수 없으며 사람의 마음이 완전히 타락하여 사악하기 때문이다. 선한 행위가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5. 회심에의 결론


웨슬레에게 있어서 은혜는 구원의 근원이요 믿음은 그 조건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하나님에게서 부터만 오며 하나님만이 양자의 유일한 원인이 되신다. 모라비안 경건주의의 영향과 올더스케이트에서의 그 자신의 체험의 결과를 웨슬레는 새사람이 되었다. 즉, 그의 믿음의 중심이 변하여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며 모든 인생을 자신의 영적인 자아 확장으로 평가하던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전 인류를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그의 사랑의 대상으로 보고 사랑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그의 종교의 중심이 변함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의인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인간이 언제나 두려움과 떨림으로 선행을 쌓는 악전고투를 하여야 구원을 성취할 수가 있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게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의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창발적으로 역사 하시는 행위이며 인간에게 값없이 주시는 믿음의 선물이며 죄인을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며 예수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새로 짓는 것이라고 웨슬레는 생각했다.

인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임재하시게 되면 의롭다 함을 받는자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자는 참으로 중생하게 된다. 그는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생활을 하게된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게 감추어진 새생활이다. 의인의 교리는 이기적이고 연약하고 천한 본연의 인간에게 호소하게 하여 인간은 여기서 힘을 얻어 그가 원하는 이상적인 인간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6. 웨슬레 회심의 의미


첫째로 웨슬레의 회심은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말한다.

앞에서 말한 웨슬레의 가문이 주는 신앙적 유산과 신학적인 그의 신앙에 확신을 주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성직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내적인 갈등과 공허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가 미국 조지아 주에 인디안 선교를 위해 떠날 때에도 실상은 자기 자신의 변화를 기대하였으나 인디언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회심하지 못하고 허탈한 상태로 영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런던 올더스케이트의 작은 집회에 참가하여 마음이 뜨거워짐을 경험하였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님으로 영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는 오랫동안 기독교적 분위기에서 살고 지도자로 자처하였지만 그리스도가 자기를 구원하기는 주님으로 자기의 삶의 중심으로 믿고 고백하며 실천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처음으로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의 새로운 자기 발견이고 자기 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의 전향을 의미한다.

웨슬레는 이 회심의 경험에서 멈추지 않고 여러번 재확인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고 거듭나므로 그리스도처럼 완전에 이르는 신앙적 훈련과 헌신을 일삼았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강조하였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이것을 기독교 사상의 극치로 본 것이다.

그의 변화는 자기 중심 곧 자기 교만과 신앙적 회의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으로 모시는 인격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변화된 인격의 신앙을 형성해야 하겠다. 인간 중심주의 권위주의 배타주의 형식주의를 떨쳐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 살아가는 말과 행동의 일치를 지향하는 인격적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다.

둘째로 웨슬레의 회심은 새로운 교회를 탄생케 하였다.

당시 영국 교회는 상류층 중심으로 제도화되고 경직된 상태로서 생명력을 잃는 시체와도 같았다. 그러므로 산업 혁명의 물결에 따라 밀려다니는 하층 구조에 속한 사람들은 교회로부터도 소외 당하고 있다. 이제 회심을 체험한 웨슬레는 제도적 교회가 그리스도의 빛을 잃었을 뿐아니라 소외 계층의 정신적 신앙적 요청에 응할 수 없는 불구자임을 실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처음에 영국 교회 자체를 복음으로 새롭게 하기 위하여 학문과 토론과 목회적 실천으로 노력을 경주하였으나 그 결과는 오히려 영국 교회부터의 파면이라는 처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국 교회와의 관계를 지속하려고 속회와 신도회에 참여하는 교인들에게 반드시 모교회에 가서 성만찬을 받도록 권고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속회와 신도회에서 신앙 훈련을 철저하게 실천하였다. 훈련받은 평신도 지도자로 하여금 속회의 구성원들의 신앙을 지도하고 생활 지침을 가르치며 그들의 문제에 대한 상담자가 되게 했다. 뿐만 아니라 교육받은 목회자가 부족하므로 영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집회소에서 평신도 지도자들을 훈련시키는데 그 중에는 여성 지도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웨슬레와 같은 시대에 유명한 부흥사 휘트필드가 있었는데 그는 웨슬레보다 부흥 운동을 먼저 시작하였고 인기도 대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향은 당대에 끝이 났고, 웨슬레의 종교 개혁은 오늘도 그 빛을 발하고 있다. 그 이유는 웨슬레는 평신도 훈련에 전력투구하였고 휘트필드는 스스로만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잘 훈련된 평신도는 사회의 각분야에 흩어져서 복음의 선교사로 열심히 활동하여 생기 발달한 감리교회를 창설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교회가 미국교회를 낳았고 우리나라 감리교회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셋째로 웨슬레의 회심은 새로운 사회 변화를 초래하였다.

당시 영국 사회는 엄격한 청교도 윤리에 대한 반작용으로 윤리적 부패가 극에 달하였는데 상류 계층일수록 더욱 심하였다. 또한 초기 자본주의의 무자비한 착취가 난무하므로 노동자들의 생활은 그야말로 절대 빈곤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유아 사망율이 최악의 상태였다는 것과 노동자의 평균 수명이 30세였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 해주고 있다.

요한 웨슬레는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의 런던의 교회에서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고아원과 진료소를 개설하고 신용협동조합과 섬유 공장을 운영하였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을 위한 세금 감소와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사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평신도들로 하여금 각자가 활동하는 사회의 여러 부분에서 양심운동, 인간화운동,민주운동을 일으킴으로써 영국 사회 전체를 구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렇듯 웨슬레의 위대함을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을 변화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영국의 사회와 역사를 새롭게 하도록 스스로 미래의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크리스천은 선구자적 예언자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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